초등친구의 죽음과 초등선생님과의 통화
삼가 고인이된 친구의 명복을 빌며.... 에제 11시경 휴대폰으로 문자가 날아 왔다 초등친구가 갑자기 죽었다고 믿기지가 않았다 몃달전 동창회떼 봤었는데.. 대충 정리하고 병원으로 갔다 병원에는 먼저온 친구들이 있었다 여친들 남친들 다들 믿기지가 않는다고 어제 아래가 계추날 인데 죽기전날 친구들에게 전화을 일일이 해서 계추에 나오라 했다던 친구인데 누가 믿겠는가.. 이제 나이 40중반인데.. 승환 성환 두친구가 있어서 다들 승환인줄 착각 했다 한다 ㅠ.ㅠ 승환이가 몸이더 약하기에... 원인은 고혈압으로 인한 뇌출혈로 갑자기 사망 했다니.. 자기가 119불러라 해놓고.. 119에선 뇌출혈 환자를 조그마한 개인병원으로 데려갔다가 경대병원으로 이송 했다 한다 초 분을 다투는 위급 사항이였건만 .. 첨부터 큰병원으로 들이댔어야 했는데 인재라는 생각이 드는건 외일까?. 친구의 운이 그기까지 밖에 안되서 일까? 나도 당뇨로 인해 몸이 안좋은 상태인데 술을 먹어도 먹어도 취하질 않는 것이다 나중엔 눈이랑 몸이 잠을 청해서 잠을잦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각지에서 친구들이 많이 왔었다 오늘 친구의 장례를 치루고 왔지만 남아있는 친구의 부인과 아이들을 보니 회한이 든다 친구야 어쩔수없이 죽음으로 이별이지만 나는 애들 셋과 생이별 중이다 애들 봐서는 무슨일을 와이프에게 당해도 버텨야 했는데 난 사람이고 사람답게 살려다보니 결국은 이혼을 택한것이다 몃백년 사는 삶도 아니지만 인간이 동물같이 살수는 없는것 아닌가?.. 애들에게도 이혼하는것이 나을것이란게 확신이 섰기에... 장례를 치루고 오는도중에 식당에 들려 다시 술을 한잔 하고 남아있는 친구들과 헤어졌다 제수씨의 다른친구들은 다있는데 외 당신만 없느냐는 말에 슬픔이 밀려 왔다 설에 있는 친구가 초등학교 6학년때 담임선생님이신던 채용학선생님을 종종 뵈는데 선생님 께서 내이야기를 많이 하신다며 전화좀 하라고 전화번호를 가르켜주고 올라갔다 6시경 전화를 드렸다 참으로 오랬만의 만남이였다 전화상으로지만 37년만의... 아직도 선생님께서 나를 생생하게 기억 해주시니.. 수많은 제자들이 선생님을 거쳐갔을것인데.. 나도 선생님을 유독 잊을수없지만.. 건강하시고 아직도 교감으로 제직하고 계신다하시니 기쁘기 그지 없다 난 퇴임 하신줄 알고 있었나.. 시간남 ?아 뵙는다고 말씀드리고 그 반가움의 짧은 시간을 그렇게 가?다 초등 6년 당시 난 반에서 공부도 10등안에 들고 육상도 했었다 공부는 꿈도 못꾸었고 수업시간에 공부한것이 거의 전부 였다 우리집은 학교서 제일 먼곳에 있었다 산속에.. 아침6시30분에 집을 나오면 학교에 8시10-20분 도착이다 반은 뛰다 시피 해서.. 집에 가는 시간은 약 3시간을 걸어다녀야 했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다니며 6년 개근을 한것이다 그당시 내별명은 미누리깜디 깜상 이였다 육상으로 긴등하교시간 농사일 등으로 타서 토인 같았다 할까? 주위의 놀림으로 상처도 많이 받았지만 어린 마음에 피가 나도록 떼를 벗겨 봤지만 씻으나 안 씻으나 까만건 마찮가지였다 초등 4년부터 중2의 육상으로 나는 엄청난 고생을 해야만 했다 그 어린시절 그먼길을 나홀로 하교를 그기간동안 거의 한것이다 약간의 간식에 팔려서.. 육상부에게 그당시 빵이 나와서 ㅠ.ㅠ 다시 6학년 시절 어느 토요일날 나는 시간이 없어서 복도에서 뛴적이 있었다 그것을 우리의 담임선생님이 보고 복도에 꿀어 앉자 있으라 하셧다 나는 그렇게 몃시간을 끓어앉자 있었다 선생님은 나를 잊고 계신것이다 벌세워 놓았는것을 다들 학교에서 하교한 상태였고 난 육상연습후 빨리 집에 가야겠기에 어쩔수 없이 복도에서 뛸수 밖에 없었는데.. 그나마 다행이였던것은 선생님 께서 다시 학교에 오셨다는것이다 나는 그떼까지 벌을 서고 있었고 초겨울 정도였던것 같다 선생님께선 미안하다고 말하시며 그당시 100원인가 1000원을 주시며 빵이라도 사먹고 집에 가라 하셨는데 불행이도 오후 5시경이라 상점들문이 다 닫혔었다 섯달그뭄같이 칠흑같이 어두운 길을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집으로 같는데 미누리(미노리가 맞고다들 미누리라 부름) 고겟길 에서 읍내쪽은 그래도 불빛떼문에 길이 어슴풀이 보임.. 고개를 넘어가면 길이 안보이는데 6년을 수많은 밤길을 다니다보니 습관적으로 길로 집으루 올라가다 (상담 중담 아랬담 이렇게 동네가 이루어져 있는데 우리집은 젤먼 상담 이였다) 아랫담을 지나 허기로 인해 동물적인 감각도 없어져서 결국은 산속에서 잠을 잤다 내인생의 죽음의 1차고비였다 솔직이 난 그떼 죽음의 공포를 맛봤다 초겨울 산속의 그추위에 어린 마음이였지만 내가 살아남을수 있을까란 회의감이 들었으니가.. 어쩨든 난 살아 남았다 습관적으로 새벽같이 께어나서 (모 늦어도 6시에는 항상 일어 났으니가 그것 떼문에 살아났나?) 집으로 올라가는데 중담을 거의 다갔을 무렵에 집에서 나를 ?으러 부모님과 누님이 초롱불을 들고 내려오고 있었다. 나를보고 어찌나 다들 우시던지...나도 엄청 울었지만.. 이글을 써면서도 친구의 죽음과 그떼를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 아직까지 이사건은 우리가족만 아는 사건이다 몃친구들에겐 이야기 했을지는 모르겠는데 다들 잊었을 것이고 그런데 나의 학교생활중 유일하게 우리 깊은산속 집을 ?아오신분이 6학년 담임선생님이시다 그당시 여학생들과 남학생들을 대동하시고 오셧는데 여학생들은 아랫담에서 우리집오는것을 포기하고 남학생 5명인가? 와 선생님 께서 예고도 없이 그 깊은 산중에 오신것이다 그떼 대접해 드린것이 아마 계란 삶은것과 고구마 옥수수 삶은것 내어드린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당시 계란은 정말이지 우리에겐 거의맞볼수 없는 특식이였다. ㅠ.ㅠ 이제는 선생님을 뵈면 이런 이야기들도 할수 있을것 같다 .. 솔직이 너무나 큰 나의 선생님에 대한 사건이라 그동안 마음은 있었지만 그렇게 살아왔다.. 초등 6년 까지의 철없던 나의 가장 소중한 시간들중 유일하게 6학년떼의 선생님만 나의 뇌리에 남아있는것 같다 요즘 당뇨로 인한 기억력 감퇴를 느끼고 있나?. 중2떼 겨울방학 끝나고 난 개학일을 잊었다 아랫담 까지 학교로 오다가 다시 집에를 가다니 ㅠ.ㅠ 운이 없을려니 동네분에게 친구 학교갔나 물었더니 모른다고 하셧나? 아님 그다음날의 사고를 감지하는 증상이였나?.. 이것으로 인해 개근상을 놓친것이다 참으로 통탄한 일이다 ㅋㅋ 사실 선생님에게 빌려고도 했었다 개근상받게 결석처리하지 마시라고 ㅠ.ㅠ 나의 8년의 퍼팩트 등교가 한순간에 끝난것이다 지각조퇴결석한번 없던.. 그리고 이튼날 학교 갔다 집으로 오다가 젯말랑의 전봇대에서 나의 2차 죽음의 위기를 맞보았다 친구와 나와 전봇대에 먼져올라가기를 한것이다 지선을 타고 지선이 4가닥인데 각기 한줄을 잡고 (동네 선 후배들이 부추겨서 이지만 ) 그눔이 나의 친척이고 같은 학년이고 ㅠ.ㅠ 어?거나 그눔은 못올라가고 나만 꼭데기 까지 올라 갔다 구녕을 보고 경치도 보고 하다가 집으로 가자며 내려오라 해서 내려 오는 도중 22.900 전기에 팅긴 것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다들 나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전기가 나의 손 배 발바닥을 차고 나가 내가 기적적 으로 살아 났나?... 전봇대 꼭데기서 추락을 하여도 그냥 즉사할수도 있었나?.. 그런 엄청난 사고에도 불구하고 그먼길을 걸어서 집에를 갔다 병원을 못가고.. ㅠ.ㅠ 사실 그떼 그사고로 내인생이 종친것이나 다름 없다 지금도 그렇지만 오래, 강하게 뛰지를 못한다 근육들이 뻣뻣해져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을 듣지 않는다 황당한건 공부를 해도 안해도 그의 같은 성적이 나온다는 것이다 평균 60-70점대 사이에서 그전엔 구래도 반 15등 안에는 들었는데 육상을 하며 공부를 안해도 ㅠ.ㅠ 영어 수학 떼문에 특히 극복을 못함 특히 영어 ㅋ 남들 공부하는 시간에 난 운동장과 기?길을 달리고 고개를 넘어서 달리기 연습을해댔어니 황당한건 그냥 내혼자 그렇게 미친짖을한것이다 코치하는 사람도 없이 채육선생님은 학교 운동장에서 다른 애들을 지도 하고 난 장거리 선수라 내혼자 그렇게 한바퀴 돌고 집에 가고 이런식의 생활 이였으니 .. 잦은 수업 뻬먹기로 안그래도 사고로 문제가 많은 나였는데.. ㅠ.ㅠ 물론 사고로 난 육상을 포기 했지만 그떼는 돌이킬수 없는 상황까지 온상태였으니 이미... 선배들의 회유 협박에도 선생님의 권유에도 그렇게 내 육상 초4-중2 까지의 생활이 끝난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집을 하나 도로실이란 곳에 샀었는데 내가 중3이라고 혼자 거기서 자취아닌 자취를 했다 공부하라고. ㅠ.ㅠ 동생들은 농사일 거들어야 했기에 .. 육상 하는 나불에 난 부모님을 많이 못도와 드렷다 형 누나 동생들이ㅠ.ㅠ 무진장 고생을 하였다 그시절 우리는 그렇게 자랐다 공부는 엄두도 못하고 학교 갔다옴 농사일에 투입되서 참 늦게 좋은 고등학교 갈려 공부도 했지만 사고로 망가진 몸에 기초가 안된 나의 영어 수학에 그렇게 나의 운동과 장래희망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영주공고를 갈려 했었는데 선생님의 권유로 안동공고를 가게 된것인데 차라리 문경공고를 갔었어야 아님 영주공고를 고집 했던가 ㅠ.ㅠ 안동공고는 사립이라 뎐이 배이상 들어가니ㅠ.ㅠ 전기로 망가진몸 전기과를 택해서 갔다 5뭉 가서 1명떨어지고 다 붇었는데 ..우린 비율이 1.75대1 선배들이 2대1 이였나? 갑자기 뜨는학교..ㅠ.ㅠ 대학교 떼문이였나?... 그렇게 내인생의 공백기인 고등 3년이 시작 되었다... 모두들 건강하시길 바라며 ...다시한번 친구의 명복을 빌어 본다.. |